파과

환갑이 지난 여자 킬러가 주인공이다. 젊은 시절 진행했던 청부 살인 대상의 아들이 킬러로 자라나 복수를 하려 했으나 연륜있는 주인공 할머니 킬러에게 결국은 패하는 결말은 살짝 억지스럽다. 이에 더해 몇몇 등장인물의 설정이나 행동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왕년에 잘나갔던, 나이 들어 퇴물 취급을 받게된 할머니 킬러의 기구한 일생이 나름 흥미롭게 그려졌다. 겁나게 자세한 표현을 많이 길게 쓰는 경향이 있어서 술술 읽히지는 않았지만, 한국사람이 한글로 쓴 한국소설이 외국작가가 쓴 글을 번역해 놓은 것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고 읽기 편하다는 생각을 다시한 번 했다.

발코니의 여자들

간만에 진짜 독특한 영화를 봤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프랑스 블랙 코미디라고 해서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웃기면서 슬프고, 친구들의 우정에 살짝 감동까지 주는 작품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이 슬프거나 안타깝게 느껴지지 않은 그런 경우는 보통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들까지 포함해서, 싫다고 말해도 못알아 듣고 강제로 관계를 맺는 남자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지 생각하니 끔찍했다.

무명 배우 엘리즈 역을 맡은 배우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했더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역을 맡았었다.

6시 20분의 남자

어쩌다 보니 또다시 발다치 소설을 읽었지만, 이번에는 메모리 맨 시리즈가 아니었다. 이책의 새로운 주인공은 과잉기억증후군으로 인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고, 대신 이런 소설에서 흔히 (?) 볼 수 있는 미 육군 특수부대 출신에, 뉴욕 월스트리트 애널리스트로 취직할 만큼 머리까지 비상한 인물이다.물론 거기에 인품도 아주 훌륭하다. 한 때 마음을 주었던 직장동료가 숨진 채 발견되는 것으로부터 사건이 시작되고, 이후 (알고보니 그녀의 연인, 그녀의 부모 등) 여러 사람이 죽어나간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로 후반부가 특히나 재미있어서 예상보다 빨리 읽었다.

무명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두 일본인 선교사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일본은 싫지만 일본인 개개인을 미워할 수는 없다. 노리마츠 마사야스와 오다 나라지, 이 두 선교사의 헌신은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고 그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늬만 혹은 말로만 기독교인인 사람들이 넘쳐나는에 요즘, 그들의 삶은 더욱 숭고하게 느껴진다.

내가 좋아라 하는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 반주로 나와서 반가웠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Rounders

포커라는 게임이 중독되는 도박이 될 수도 있고, 사람과 판세를 읽는 기술이 요구되는 스포츠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인 것 같다. 주인공 맷 데이먼은 전 재산을 탕진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결국 법대를 포기하고, 세계 최고의 포커 플레이어에 도전하기 위해 라스베거스로 향한다. Texas Hold’em은 그렉네 집에서 때때로 자주 했던 게임으로, 서점에서 포커 관련 책들을 살펴본 적도 있었다. 다른 경기들과 마찬가지로 잘 하는 사람들이 플레이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해서, 출장이나 여행 중에 케이블 채널을 볼 수 있는 호텔 방에서는 World Series of Poker 경기도 자주 보곤 했다. 그리고 맷 데이먼, 에드워드 노튼, 존 말코비치 모두 연기를 참 잘했다. 그래서 오래된 영화임에도 재미있게 보았다.

기억을 되살리는 남자

오랜만에 발다치 작가의 책을 읽었다. 우리의 메모리 맨이 새로운 파트너와 함께 하나의 공간에서 일어난 두 개의 (알고 보니 전혀 다른/상관없는) 살인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다. 여러차례에 걸쳐 반전도 있고 구성에 짜임새도 있고 재미가 없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몰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내 집중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남자 주인공이 안쓰러우면서 정이가고, 소설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좀 후루룩 편하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메이오 클리닉의 건강하게 나이 드는 법

세월에 장사 없다고 나이가 들면서 노화 자체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떻게 늙어갈지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총 19장에 걸쳐서 회복 탄력성, 면역력, 수면 등 실질적 관리법뿐 아니라 운동, 건강한 식단, 은퇴 후의 삶까지 아우르며, 나이를 초월하여 건강하게 늙는데 도움이 되는 방대한 지식과 안내를 제공한다. 노인들이 스스로 건강관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연구를 하고자 하는 나에게, 곁에 두고 참고할 만한 매우 유용한 책이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영화 포스터에는 무지개 떠있는 파란 하늘 아래 신이 난 세 아이의 모습과 함께 “우리를 행복하게 할 가장 사랑스러운 걸작” 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는데, 결말은 좀 많이 황당하고 사기당한 느낌이다. 국민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의 잘못이 가장 크겠지만, 그렇다고 딸 아이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선을 넘은 엄마의 선택 역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4세 고시라는 말이 유행하는 대치동의 엄마들과 정반대에 있다고 해야 할까? 부모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

나이가 드니 때때로 자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생이라는게 어떻게 보면 죽어가는 과정이니, 어떻게 살 것인지와 어떻게 죽을 것인지가 일맥 상통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얼마가 될 지 모르는 남은생을 잘 살다가 잘 죽고 싶다. 이 책의 저자처럼 억울한 죽음, 불쌍한 죽음에 관심 가져주고 어루만져 주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

물통은 구멍이 난 부분 이상으로 물을 채울 수 없고, 목걸이가 끊어질 때도 가장 약한 고리가 먼저 끊어진다. 우리 사회 역시 가장 약한 부분에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연재해든 인재든 언제나 가난한 이들, 사회에서 소외받은 이들이 가장 큰 희생자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희생과 비극은 결국 사회 전체로 번진다. 이것이 우리가 불편을 감수하고, 가장 약한 곳에서 출발해야 하는 이유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의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에게도 의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저자가 오래전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라며 다음과 같이 다소 극단적인 “젊은이의 직업 선택의 십계”를 소개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가,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청춘의 독서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 중 한명이자, 내가 격하게 존경하는 유시민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읽었던 수많은 책들 중에 청년 유시민을 만든 원천으로 꼽은 15권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다. 2009년에 출간된 책의 특별증보판인데, 새로 추가된 15장에서 계엄 사태까지 언급된 것을 보고 확인해보니 종이책은 4월 30일에 출간되었다.

우선은 『자유론』, 『 죄와 벌』, 『맹자』 정도를 읽고 싶은데, 읽으려고 사 놓은 다른 책들도 좀 있어서 고민스럽다. 한국에 돌아온 후 아쉬운 점 중 하나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예전 미국에서 지낼 때만큼 책을 읽지 못한다는 점이다.

밀은 1859년 그 옛날에 쓴 책에서 그런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어리석은 자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후 화나고 아프고 어이없는 일들을 견디고 이겨낸 이들에게, 계엄의 밤 국회에서 계엄군을 막아섰던 시민들에게, 남태령의 기적을 만든 젊은이들에게, 눈보라를 맞으며 헌법재판소 앞에서 밤을 지새웠던 남녀노소에게, 무한히 큰 감사의 마음을 얹어 그 말을 전하고 싶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오늘 우리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들은 인간의 모든 자랑스러운 것의 근원을 보여주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단 한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화나고 아프고 어이없는 일들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이 되어준 유시민 작가에게 무한히 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1. 위대한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2.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3. 청춘을 뒤흔든 혁명의 매력 :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4. 불평등은 불가피한 자연법칙인가 : 토머스 맬서스, 『인구론』
  5.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알렉산드르 푸시킨, 『대위의 딸』
  6. 진정한 보수주의자를 만나다 : 맹자, 『맹자』
  7. 어떤 곳에도 속할 수 없는 개인의 욕망 : 최인훈, 『광장』
  8. 권력투쟁의 빛과 그림자 : 사마천, 『사기』
  9. 슬픔도 힘이 될까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10.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인가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11. 우리는 왜 부자가 되려 하는가 :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12. 문명이 발전해도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13. 내 생각은 정말 내 생각일까 :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14. 역사의 진보를 믿어도 될까 :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15. 21세기 문명의 예언서: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